가면을 벗어라. 정의의 얼굴을 한 죄인들아, 양심의 옷을 입은 탐욕들아, 가면을 벗어라. 도덕을 외치던 입술이 뒷문으로 특권을 삼키던 그 연기, 그 쇼, 그 거짓의 무대— 오늘로 끝이다. 가면을 벗어라. 남에게 던진 잣대를 자신에게서 숨기고, 부끄러움은 잃고 당당함만 배운 그 뻔뻔한 얼굴 아래— 진실은 울고 있다. 가면을 벗어라. 합법의 말, 불법의 행동, 평등의 외침, 특권의 실천, 공정의 포장지로 포식하던 그 두 얼굴들, 그 가면들, 그 가면들을 모두 벗어라.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화려한 대사도, 민주를 가장한 슬로건도 더는 필요 없다. 가면 아래가 어떤 얼굴이든 빛 아래 드러나라. 가면을 벗고 나면 남는 것이 두려운 자여, 그 두려움이 바로 네 진짜 얼굴이다. 가면이 떨어진 자리는 흙가슴으로 메워라. 부끄럼이 돌아오게 하라. 책임이 숨을 쉬게 하라. 사람이 사람을 속이지 못하는 세상을 세워라. 그 위에 아이들의 미래를 올려라. 그 위에 법 앞의 평등을 세워라. 오늘 이후 가면을 벗고 쓰레기처럼 버려라. 허위의 배우들은 퇴장하고 양심의 시민들이 무대로 오라. 이 나라에 가면을 벗어라. 오직 얼굴만 남아라. PS: 이 시는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
더사피엔스 조전혁 | 대한민국 정치판은 지금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집단 가출 상태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것은 기본이고, 뻔뻔함이 곧 권력의 원천인 양 행동하는 위선자들의 대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최근 1억 원 수수 의혹 속에서도 "삶의 원칙을 지켰다"고 강변하는 어느 국회의원의 발언이나, 온 가족의 입시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나고도 '순교자' 행세를 하는 조국류의 인물들은 이제 우리 사회의 도덕적 암세포가 되었다. 이들의 수법은 이제 공식화했다. 명백한 물적 증거 앞에서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거나, "사회적 관행"이라는 마법의 단어로 범죄를 세탁한다. 더 나아가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너희는 깨끗하냐"며 성경 속 예수를 참칭하는 '반푼이 메시아' 놀이에 몰두한다. 이는 용서의 메시지가 아니라, 온 세상을 진흙탕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구정물을 희석하려는 물귀신 작전이다. 이런 작태가 공식처럼 반복한다는 건 이 뻔한 수작이 먹힌다는 반증이다. 한심한 일이다. 이런 자들이 '지도자'의 가면을 쓰고 활보하는 사회에서 정의는 허풍선(虛風扇)이 된다. "정직하면 손해, 뻔뻔하면 승리"라는 파괴적인 공식이 공동체의 혈
최근 조진웅 사태를 둘러싼 반응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이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사고를 포기하는지 확인했다. 쟁점의 성격이나 사실의 무게를 따져보는 수고는 생략되고, 진영의 색깔만 확인되면 말은 자동으로 발사된다. “우리 편이면 보호, 상대편이면 응징.” 그 단순한 알고리즘이 윤리라는 이름을 달고 작동한다. 이 장면은 ‘1984’가 경고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감시사회” 이야기로만 기억하지만, 핵심은 언어다. 오웰이 창조한 신어(Newspeak)는 단어를 줄이고 뜻을 단순화해 사고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 체계다. 생각할 말이 사라지면, 생각도 사라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꽥꽥이(duckspeaker)다. 오리처럼 훈련된 소리를 즉각 내는 인간형. 소설 속 전체주의 체제인 오세아니아의 통치자인 빅 브라더가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인간형은 더욱-더-좋은 꽥꽥이(doubleplusgood duckspeaker)다, 신어가 만들어지기 전의 일상어인 구어(舊語: Oldspeak)로 번역하면 double=더욱, plus=더, good=좋은, 오리=duck, 말한다=speak, 사람=er이다. 즉 “더욱 더 훌륭하게 오리처럼 즉시
대한민국에서 결혼은 이제 낭만이 아니라 ‘경제적 자해 행위’에 가깝다. 입으로는 인구 소멸을 걱정하며 수백조 원을 쏟아붓는다는 정부가, 정작 법과 제도라는 몽둥이로는 결혼한 부부의 뒷덜미를 후려치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 페널티’라고 불리는 기괴한 징벌 체계는 이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망가뜨리고 있다. 현행법은 마치 국민에게 “세금 내기 싫으면 이혼하라”고 협박하는 듯하다. 1주택자끼리 만나 가정을 꾸리면 즉시 ‘다주택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종부세와 재산세 폭탄이 떨어진다. 반대로 서류상 남남이 되는 순간, 마법처럼 세금은 사라지고 공제 혜택이 쏟아진다. 증여세는 또 어떤가. 부부로 살며 재산을 합치면 세무조사를 걱정해야 하지만, 이혼하며 재산을 가르면 ‘재산분할’이라는 이름으로 세금 한 푼 없이 거액이 오간다. 국가가 나서서 ‘위장 이혼’을 컨설팅하고, ‘비혼’을 가이드하는 꼴이다. 헌법 제36조 제1항이 명시한 “혼인과 가족생활의 보장”은 장식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국가가 앞장서서 헌법을 조롱하며 혼인한 국민을 차별하는 이 상황은 명백한 위헌이자 혼인에 대한 국가적 테러다.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선진국과 한국의 격차는 극명하다. 독일
자유와 번영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는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이제 그만 사용해야 한다. 이 용어는 급진 사회주의자들이 시장경제를 적대화하기 위해 고안한 '프레임 전략'의 산물이며, 이 용어를 쓰는 한 우리는 지적 전쟁에서 영원히 패배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는 번영과 혁신을 상징하는 동시에, 빈부 격차와 착취의 원흉으로 비판받는 모순적인 단어이다. 이 단어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을 아는가? 시장 경제 체제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불편한 진실은, 이 용어가 ‘자본주의의 적(敵)’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내 자녀의 이름을 내 원수가 작명한 것과 같은 꼴이다.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용어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처음 사용하고 널리 퍼뜨린 이들은 시장 경제를 찬양한 사상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루이 블랑(Louis Blanc),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같은 19세기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이 용어를 통해 시장 경제 체제의 핵심 동력을 '자본(Capital)'의 사적 소유로 한정지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명확했다. 시장의 다양한 긍
1990년 MBC 드라마 『똠방각하』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었다. 최기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완장 하나에 취해 스스로를 정의와 질서의 화신으로 착각하는 인간형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리, 이른바 ‘완장병’을 해부한 풍자극이었다. 드라마의 주인공 김덕수는 시골 마을에서 직책 하나를 손에 쥐자마자 안하무인으로 돌변한다. 기술도 없고 식견도 없지만, 그는 모든 문제를 호통과 질책으로 해결하려 든다. 설명은 변명으로 치부되고, 반대는 불손으로 낙인찍힌다. 결국 김덕수는 완장을 믿고 날뛰다 주민들의 몰매를 맞고 쫓겨난다. 해학으로 포장된 결말이지만, 메시지는 섬뜩하다.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권력을 다루는 능력의 부재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경고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 이학재 사장을 공개 석상에서 질타한 장면은, 이 오래된 드라마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대통령은 ‘지폐를 책에 끼워 밀반출하면 적발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는 식의 가설을 전제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공항 보안검색의 기술적 한계, 외화 단속의 주체가 세관이라는 제도적 구분, X-ray로 지폐의 성격이나 액면을 식별할 수 없다는 기본적 사실은 질문의 전제에서 빠져 있었